울릉도 원주민과의 하루

  정해진 계획대로라면, 사실상의 울릉도 마지막 날이다.  물론 내일 정상적으로 배가 나간다고 할 경우이다.  울릉도로 들어올 때는 울릉도를 완전히 파 해치려 했는데, 이제 겨우 그 반 정도를 본 샘이다.  시간이 아까워서 오늘은 임영광씨에게 일정을 맡겼다.  사실은 맡겼다기 보다는 빼앗아 가 버렸다.  그저 가자는 대로 따라 갔다.  핸들을 잡고 있으니, '내리라면 내리고, 보라면 보고' 하는 수밖에 도리 없다.  오늘 가는 길에는 울릉도 7개의 천연기념물 중 세 개가 있다.  사동 흑비둘기 서식지, 통구미향나무 자생지, 태하령 솔송·섬잣나무 군락.
  통구미 거북바위에서 차가 섰다.  거북바위를 한 바퀴 돌면서 거북바위의 유래니, 통구미의 한자를 일본 사람들이 잘 못 써서 계속 사용되고 있다느니 등이 계속되었다.  훌륭한 관광 가이드였다.  임영광씨는 불그스레한 바위에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는 향마무를 보면서, 인간들이 얼마나 간사한지를 설명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항상 변하지 않는 저 향나무와 우리 인간을 비교하면서.  통구미의 가옥 경관은 첫날 보았던 사동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통구미를 지나려면, 통구미 터널을 마주치게 되는데, 울릉도의 특징을 잘 반영하는 경관이다.  터널 앞에 신호등이 있다.  터널을 넓게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자동차의 교행이 어렵다.  그래서 신호에 따라서 일방통행을 하는데,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노란색 신호를 잘 지키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벗어나자 마자 곧바로 남통터널과 남양터널을 마주치데, 모두 똑 같다.  여기까지 가면서도 사자바위, 투구바위, 인디언 추장 등 일행의 관심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남서 일몰 전망대를 가는 길에 농협에서 운영하는 호박엿 공장을 들렸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울릉도 남서 해안의 경관은 볼 만 하였다.  그렇지만, 일행 대부분은 '우리가 관광하러 왔냐?'는 불만으로 가득 찬 것 보인다.  그렇다고 기사에게 이것저것을 주문하면 답사를 그르칠 수도 있고.  그저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다행이 전망대를 내려오는 길에 하나를 보았다.  할머니 두 분이 밭을 일구고 있는데, 같은 화산섬이지만 제주도와는 영 다르다.  돌을 골라내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그 돌을 지름작찌(기름 자갈)이라 하여 웬만하면 밭에 그냥 둔다.  이게 있어야 토양 수분의 증발을 막아 준다.
  남양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남서리로 향하였다.  먼저 들른 곳이 남서리 고분이다.  15기가 있는데, 현포리 고분에 비해 잘 보존되어 있다.  현포리에서는 누가 어릴 적에 전쟁놀이도 했다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현포에 비해 급경사지에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우산국 시절의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제부터는 아마도 관광객은 가지 않을 곳이다.  드디어 점심 먹은 것이 소화가 되는 듯하다.  옛날에는 이 길로 태하령을 넘었다 한다.  길은 마지막 집이 있는 곳까지 깔끔하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답사하는 기분이 절로 들었다.  마지막 집 나발동까지 들어갔다.  아마도 다른 기사였으면 자발적으로는커녕, 가자고 우겨도 못 간다고 할 곳이다.  나는 운전에 관한 한 임영광씨 만을 믿었다.  아마 그런 믿음이 없이는 못 갈 것 같다.  나발동에 이르니 마치 고위평탄면에라도 선 듯하다.  여기까지도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  모든 가옥에 우딸을 설치하였다.  특이한 점은 북서쪽이 아니라 남쪽의 선정을 향하여서도 그것을 설치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로는 북풍이 산에 부딪쳐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란다.  울릉도 사람은 죽어서도 바람막이가 필요한 가 보다.  높은 산에 있는 묘지마다 방풍림을 둘러치고 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바람에 흙도 날아가 버리고, ...."  그렇다 죽어서도 바람막이가 있어야 하는 곳.  이런 곳이 울릉도이구나.  방풍림은 꽤나 크게 자랐다.  흙이 날리는 것을 방지해줄 뿐만 아니라, 잡초 씨가 날아오는 것도 막아 줄 수 있겠다.  갑자기 고향 뒷산에 누어 계신 할머니 묘를 찾았을 때, 어디서 날아 온 지도 모르는 이상한 서양 민들레가 자라고 있음을 보고, 곧 제주도 전역을 이놈에 서양 민들레가 뒤 덮어버릴 것을 걱정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묘지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길에 그만 실수로 금방 만들어 놓은 듯한 무덤을 밟았다.  '이제 큰일을 냈구나'하고 주인에게 무언가 물었더니, 다행이 무를 묻어놓은 것이란다.  눈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그 가운데에 대나무를 꽂아 놓고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우딸이 곧게 단장된 집에서 뵌 한 노인은 수질하지 않았냐고부터 걱정이다.  "난 수질에 질렸어."  일제 때 징용을 피하여 안동에서 숨어들어 온 것이 오늘이라는데, 나룻배에 몸을 맡긴 옛 우리의 젊은이들이 보이는 듯하다.  아마도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저 배라도 타보고 죽자'는 심정으로 그 배를 탓을 것이다.  
  구암까지 일주도로를 탔다.  구암 분교는 최근에 문을 닫은 모양이다.  마라도의 분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학교라 생각했는데, 이 곳이 더 작았던 모양이다.  마라 분교는 운동장도 꽤나 넓던데.  구암천을 따라서 차가 등반을 시작하는데, 일행들에게 겁을 주었다.  "이 정도는 고속도로야."  해발 300m정도를 넘어서니, 도로 바닥에 눈이 보인다.  "웬만하면, 돌아가세요."  우리는 태하령을 넘지 않는 것으로 계약을 하였다.  "갈 때까지 가봅시다."  나는 드디어 '이 사람의 주특기가 발휘되기 시작했구나'하면서 뿌듯해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결국은 차가 서고 말았다.  몇 번이고 시도하지만 계속 뒤로 밀린다.  물론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걱정은 잡아 묶어 두었다.  아마도 태하령을 오르려면 한 번은 쉬는 곳인가 보다.  지난 봄에도 그러더니.  몇 번의 시도 끝에 우리의 호프답게 오르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태하령.  462m 밖에 안 되는 태하령.  그렇다, 육지에서 462m 정도의 고개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는 울릉도의 태하령이다.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곳, 태하령이다.  천연기념물 50호인 솔송나무와 섬 잣나무를 보기 위해서, 차를 잠시 세웠다.  일행은 천연기념물이고 뭐고 보다, 고개 자체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태하령 고개 마루 부근에는 그 두 가지 나무가 많다.  그보다 조금 낮은 곳에는 역시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너도밤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천연 기념물이다.  너도밤나무는 열매가 없을 때는 밤나무와 구분이 어렵다.  생긴 것은 똑 같은데, 밤이 열리지 않는다.  애틋한 전설도 서려 있는 너도밤나무.
  고개를 다 내려왔다고 마음을 놓고 있는데, 차가 다시 산으로 꼬부라진다.  서달령을 간다는 것이다.  태하령을 넘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것이 걱정이다.  다시 눈도 내리고, 해가 떨어지면 바닥도 얼어붙을 테인데.  그렇다고 가자는 길을 마다할 수도 없고.  그러는 사이, 눈이 번쩍 뜨인다.  적어도 지리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광경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새 밀레니엄이라고 떠들어대는 2000년에.  사람이 쟁기를 끌고 있다.  훌치질을 하고 있다.  21세기에 사람이 쟁기를 끈다.  아마 여기가 아니곤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70년대에 그 광경을 보고 '내가 마지막이다'라고 자랑을 했다 하던데, 우리는 2000년 1월에 마지막 정도로만 해두기로 했다.  일행은 저 사면을 어떻게 일구나 하는 것이 궁금하였던 터이다.  '저것이 그 방법 중 하나이구나.'  벌써, 나물 씨앗을 뿌리기 위한 것이란다.  역시 따뜻하기는 따뜻한가 보다.  서달령에 오르니 여기야말로 고위평탄면이다.  축사 냄새가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소를 많이 키우는 모양이다.  어느 집에는 분재가 눈에 띠게 많은데, 사실은 울릉도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아마도 분재를 키우지 않는 집이 없을 정도이다.  이게 섬의 특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마지막 목적지인 학포로 향하였다.  어제 보았던 태하터널을 지나, 산이 마구 깎이고 있는 곳까지 가보았다.  사실 차가 갈 수 있는 마지막이다.  여기서 본 바다 쪽의 경관을 우리나라 제 1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학포에는 빈집이 많다.  그렇게 아름다운 터를 다 버리고 떠났다.  작년 2월에 폐교한 학포분교 자리는 벌써 학교의 흔적을 없에기 시작하였다.  지난 봄에 만하여도 "땡 땡"하면, 아동들이 막 뛰어 나올 것만 같았는데, 교실은 간데 없고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다.  아마 일주도로가 완공되면, 버리고 갔던 집을 다시 찾아오겠지.  학포는 울릉도 개척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곳이라 한다.  그렇게 의미 있는 동네로 보이지 않는다.  마을 한 구석진 곳을 찾아보면, 큰 바위에 뭐라 글을 파 놓은 것이 있다.
  「檢察使  李奎遠 高宗八 ......」
  한자를 잘 모르지만, 고종 8년에 울릉도 개척령을 발표하기 위해 이규원이란 검찰사를 보내어 확인하도록 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도동 항구에 있는 오징어탑이나, 개척기념비보다 더 소중한 유산인 것 같다.  이상하게도 이것은 버려져 있다.  15년 전에 이것을 보았던 사람은 훨씬 더 많은 글을 읽을 수 있었다는데, 점차 풍화를 받아 희미해가고 있다.  아마도 학포가 소중한 것은 이 것을 보고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다행이 일주도로가 만들어지고 있어서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학포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당연히 서쪽 끝에 자리한 학포에도 바람이 많다.  우딸 뿐만 아니라, 동백나무도 상당히 편형되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태하령을 넘을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섬목에서 가는 배는 이미 끊긴지 오래 되었고, 어떻게든 넘어야 한다.  아무래도 너무 무리한 것 같다.  걱정과는 달리 태하령을 쉽게 넘었다.  "아까, 윗통구미가 보고 싶다고 했죠?"  "네."  "그럼 가 봅시다."  바로 이런 것이 이 사람의 주특기인데, 또 시작되었다.  오전에 지나쳤던 국수바위를 지나 윗통구미길로 접어들었다.  "눈이 계속 내리면 못 가는데."를 하면서도 마구 달린다.  '내가 왜 윗통구미 타령은 해 가지고'를 중얼거렸다.  이건 차 가라고 만든 길이 아니다.  몇 년 전에 차를 운전하여 알프스를 넘을 때,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쳐다보면서 '아니, 저 길을 내가 가야 한단 말이야' 고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알프스보다도 더 아찔하다.  차라리 알프스는 길이라도 넓고, 태하령은 나무가 있어 낭떨어지가 보이지라도 않는데, 여기는 저 길 밑이 다 보인다.  '여기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도대체 .....'  아무 생각이 없다.  답사를 할 수 없다.
  아마 이 길은 우리끼리는 못 갈 곳이다.  울릉도를 잘 아는 임영광씨가 같이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이 아침에 보았던 거북바위이다.  '이젠 살았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어렵게 간 윗통구미 답사는 0점이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다. 사실은 많이 보았지만, 해도 저물었고, 마음도 떨렸기 때문이다.  겨울이 아닌 대 낮에 갔더라면, ....



* 여기서 오늘은 2000년 1월 11일이며, 이 글은 23일에 썼는데, 미진한 면이 많다.